퍼온 글들

불편한 사랑 - Paper -

겨울거북이 2006. 1. 6. 00:39

 

 

       [불편한 사랑]

 

나는 가진 것이 없고 그대는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우니,
그대에게 나의 가난한 노래를 드릴게요.
나의 보잘것없는 이야기와 불편한 사랑을 드릴게요.
이제 생각해 보니 그동안 우리는 너무 편안한 길을 걸어왔어요.
누군가 이미 만들어놓은 길 위를 그저 밟아왔던 거예요.
아픔은 피하고 고통은 외면하고 슬픔은 나뭇가지 위에 걸어둔 채로,
그러나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다고 불평하며 걸어온 지난 길을
나는 지금 돌아보고 있어요. 그건 어떻게 끝날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러나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어렵게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아주 잠깐의 실수로 산산조각 나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사랑의 잔을 그대에게 드릴게요. 가장 얇은 종이보다
더욱 더 얇은, 그것을 잡을 때면 온몸의 세포를 곤두세워야 하는,
유리로 만든 사랑의 잔이에요. 한 모금의 성숙한 와인을 얻기 위해,
그대는 날마다 깨끗한 천으로 그 잔을 닦아야 할 거예요.
마음을 졸이며 반짝반짝 빛날 때까지, 완벽한 투명함을 얻을 때까지.
두 손은 부르트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도, 그대는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수백 번을 뒤풀이하여 읽어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텍스트를
그대에게 드릴게요.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 없는 갈증이 더해지는,
그러나 가끔 그 모든 고통을 씻어줄 차가운 샘물이 솟아나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지만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텍스트예요.
나의 사랑은 그 갈피마다 숨어 있지만, 그대의 시선이 이르기 직전에
다른 곳으로 달아날 거예요. 그대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곳에 남아 있는 온기,
이제 막 사라지려고 하는 빛, 구석을 떠도는 메아리만을 더듬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대는 책장을 덮을 수 없어요.

 

 

아주 어려운 암호들로 가득 채워진, 해독할 수 없는
사랑의 지도를 그대에게 드릴게요. 존재하지 않는 장소들을 가리키는
보이지 않는 지명들을 헤아리며, 그대는 홀로 길을 찾아야 해요.
그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수억 년 전에 시작된 별빛과
낡은 나침반뿐이에요. 그대는 어두운 동굴에서 무서운 괴물과 싸워야 하고,
복잡한 미로로 가득 찬 성에서 나쁜 마녀와 맞서야 해요.
그대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모두 거짓이 되고,
그대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먼지로 변할 거예요.
그러나 끝이 없을 것 같은 그 동굴의 끝,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성의
가장 높은 탑까지, 그대는 가지 않을 수 없어요.

 

 

나의 사랑, 세상의 누구보다 아름답고 귀한 그대에게,
이 불안하고 힘들고 안타까운 사랑을 드릴게요.
불편하고 어렵고 거친 사랑을 드릴게요. 달콤한 밀어와 부드러운 손길은
더 이상 기대하지 말아요.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대가 싸워야 할
이 세상과 어디에나 널려 있는 슬픔과 온전히 혼자 견뎌야 하는
천 년 같은 밤이에요. 내 사랑, 나를 원망하진 말아요.
이것이 진짜 사랑이고, 이 사랑은 내게 속해 있는 게 아니니까요.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걸 그대는 이미 알잖아요.
그대가 정말 원하는 것은 그곳에 있다는 것을, 그대는 이미 알고 있잖아요.

 

         - 황경신 - Paper 편집장.

 

***        Paper 2005년12월호  - editor's diary 를 copy했습니다.